
솔직히 말하면, 저는 프랑스 여행 전까지 고흐가 1순위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모네나 마네 쪽이 취향에 더 맞았고, 고흐는 왠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뒷전이었어요. 그런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직접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고흐의 작품을 실제로 몇 번 보고나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제대로 보고 싶어졌습니다. 2017년 개봉한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는 세계 최초의 장편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125명의 화가가 6만 5천 장 이상의 유화 프레임을 직접 그려 완성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고흐를 향한 헌정 영화로, 고흐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봐야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처음 실물로 봤을 때, 사진으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유화 특유의 물감 덩어리가 캔버스 위에 두껍게 얹혀 있어서, 그림이 더 사실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디지털 화면으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되는 입체감이었습니다. 빛의 각도에 따라서 두껍게 발린 유화 물감이 반짝여서 그 자리에 서서 오래 보게 되는 명화들이었습니다. 처음 러빙 빈센트가 개봉했을 때는 고흐에 관심이 없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유화의 매력을 또 한 번 느끼고 싶어서입니다. 한편으로는 '러빙 빈센트'가 감동적인 영화일까 하고 반신반의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공들여 그렸다 해도 화면으로 봤을 때 그 감동이 오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 달리, 직접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거대한 유화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어요. 모든 장면이 실제 붓질로 이루어진 덕분에 화면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늘은 소용돌이치고, 강물은 넘실거리고, 인물의 얼굴 위로 붓 자국이 시시각각 변했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된 것은 2017년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였습니다. 안시 영화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 전문 영화제로, 매년 프랑스 안시에서 개최되며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권위 있는 행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이 영화제에서의 공개 이후, '러빙 빈센트'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제75회 골든 글로브 애니메이션 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 개봉 당시 저는 일부러 이 영화를 찾아서 보지 않았습니다. 고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왠지 거기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약간의 반항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영화관에서 봤어야 했는데 싶어서 정말 아쉽습니다. 큰 화면으로 봤다면 감동이 몇 배는 더했을 것 같거든요.
고흐를 둘러싼 영화의 전개 방식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그냥 '고흐 일대기를 유화로 그린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를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완전히 달랐어요. 이 영화의 진짜 구조는 추리극에 가깝습니다.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집배원의 아들 아르망 룰랭이 전달하지 못한 편지를 들고 고흐의 주변인들을 찾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는 '로토스코핑(rotoscoping) 기법'이 핵심적인 제작 방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토스코핑이란 실제 배우의 움직임을 촬영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려 자연스러운 동작을 구현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영상을 먼저 찍고, 화가들이 그 위에 고흐의 화풍으로 유화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덕분에 애니메이션임에도 인물의 동작이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고 실제 모습과 가까운 자연스러움을 유지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고흐가 실제로 그린 초상화의 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실존 인물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고흐를 기억하며 서로 엇갈리는 증언을 내놓습니다. 어떤 이는 그를 조용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어떤 이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상충하는 증언들이 쌓이면서 영화는 '고흐의 생의 마지막 진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관객 앞에 던집니다. 후기 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는 사조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후기 인상주의란 인상주의의 색채 실험을 발전시키되 화가 개인의 감정과 주관적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 미술 흐름을 가리킵니다. 고흐는 이 흐름의 대표 화가로 꼽히며, 그의 소용돌이치는 하늘과 강렬한 색채 대비는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닌 내면의 감정을 시각화한 결과물로 평가받습니다. 영화는 이 화풍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살려냄으로써 고흐의 감정을 관객이 직접 체감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고흐의 작품은 '꽃 피는 아몬드 나무'입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어떤 아름다움과 희망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또한, 고흐가 마지막을 보낸 장소에 직접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밀밭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괜히 더 뭉클했습니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형을 평생 믿고 지원했던 것처럼, 이 영화도 그 마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 영화 속 현재 시점: 고흐의 화풍을 재현한 화려한 컬러 유화 애니메이션
- 영화 속 과거 회상 장면: 사실주의 화풍의 흑백 그림으로 표현, 현재와 명확히 구분
- 주요 배경: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론강', '오베르의 교회', '가셰 박사의 초상' 등 실제 작품을 공간으로 재현
- 마지막 노래: 리앤 라 하바스가 커버한 돈 맥클린의 'Vincent(Starry, Starry Night)'. 고흐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헌정곡
헌정 영화로서 이 작품이 남기는 것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왜 이제 봤을까?' 하는 후회였습니다. 두 번째 생각은 '이걸 만든 사람들이 고흐를 정말 사랑하는구나'였고요. 125명의 화가가 5년 넘게 매달려 6만 5천 장의 유화 프레임을 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가 그저 흥행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게 느껴집니다. 제작비는 약 550만 달러로 대형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소규모였습니다. 그런데도 2017년 12월 손익분기점인 1,500만 달러를 넘겼고, 한국에서도 2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며 해외 흥행 순위 2위에 올랐습니다. 한국 관객들의 고흐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새삼 실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BIS). 영화의 제목 'Loving Vincent'는 고흐가 테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끝에 쓰던 서명, '너를 사랑하는 빈센트(Your loving Vincen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제목 자체가 이미 헌정사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 추리극이라는 외형은 서서히 흐려지고, 고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애도와 사랑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고흐는 생전에 작품이 단 한 점만 팔렸고, 동생 테오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습니다. 영화는 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 빈자리와 기억으로 채웁니다. 그 방식이 오히려 더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줄거리가 추리극 구조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추리물'로 놓고 보면 실망스럽고, '고흐에게 바치는 움직이는 헌정사'로 놓고 보면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영화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고흐에 대해 잘 모르면 영화를 즐기기 어렵나요?
A.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건 맞습니다. 영화 속 배경과 인물 대부분이 실제 고흐의 작품에서 나온 것들이라, 그의 그림을 알수록 오마주 장면마다 반가운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전혀 몰라도 영화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영화를 본 뒤, 자연스레 고흐의 일생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됐습니다. 저는 고흐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물론이고, 아직 잘 모르는 분들께도 이 영화를 추천드립니다.
Q. 영화는 고흐가 타살당했다고 결론 내리나요?
A. 아닙니다. 영화는 여러 가설과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어느 하나를 확실한 진실로 단정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르게리트가 아르망에게 '그의 죽음의 이유보다 그의 삶을 얼마나 아느냐'고 되묻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러빙 빈센트'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걸 만든 사람들이 고흐를 얼마나 사랑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Q. 유화 프레임은 실제로 몇 장이나 되나요?
A. 영화에 사용된 유화 프레임은 6만 5천 장 이상입니다. 125명의 화가가 참여해 실제 제작 기간만 5년 이상 걸렸습니다. 일부 프레임은 완성된 그림 위에 다시 덧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배우의 실사 촬영을 바탕으로 한 로토스코핑 기법이 전체 작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