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동생이 있는 분이라면 아마 블랙 위도우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게 공감하실 겁니다. 영화관에서 나타샤와 엘레나가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끝내 등을 맞대고 싸우는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제 여동생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블랙 위도우는 '블랙 위도우의 활약' 이야기보다, '자매 간의 오해를 풀고, 현재 세대와 다음 세대 블랙 위도우가 함께 활약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히어로 영화라기보다 가족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블랙 위도우의 전체적인 장면에 대한 평가와 빌런, 세대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체적인 장면 평가
블랙 위도우의 첫 장면은 마블 스튜디오 유니버스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힐 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스파이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인 미디어스 레스(in medias res) 기법, 즉 사건의 한복판부터 시작해 관객을 단숨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연출은 서사의 발단 없이 가장 긴장감이 고조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고전적 서술 기법입니다. 가짜 가족으로 살아온 1995년의 오하이오 장면,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탈출 장면은 007 시리즈나 제이슨 본 시리즈의 감성을 참고했습니다. 저는 이 첫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이게 마블 영화가 맞나' 싶었습니다. 이 장면은 장르의 문법을 정확히 이해한 연출이었고, 초반 가족 구성원의 배치가 중반부 인물 관계와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구조도 완성도를 높여줬습니다. 하지만, 첫 장면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이후의 전개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었습니다. 특히, 저는 부다페스트 장면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벤저스 1편부터 무려 9년에 걸쳐 언급되며 팬들의 기대를 키워온 요소인데, 영화에서는 대사 몇 줄로 지나갔습니다. 영화 개봉 당시 팬들은 이 부분에서 실망감을 느꼈고, 저도 그 반응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초중반 액션의 경우 아파트 격투 전은 긴장감을 줍니다. 체계화된 격투 기술 없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전투 방식이 나타샤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다만, 다른 마블 영웅들의 개인 영화와 비교하면 전개와 영화 편수가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빌런의 중요성
MCU 영화에서 빌런의 서사 완성도는 작품 전체의 평가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따라서 블랙 위도우 영화에서도 빌런이 중요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크게 갈립니다. '태스크마스터'의 경우, 원작 코믹스에서는 타인의 전투 동작을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모방하고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이 설정 자체는 영화에도 살아 있지만, 서사적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정체 공개 이후에도 이 빌런이 이야기를 이끌지 않고, 사실상 교체 가능한 서브 빌런으로 소비됩니다. 직접 나서지 않고 조직을 운영하는 지도자형 악당인 '드레이코프'도 등장하지만,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에 등장했던 '알렉산더 피어스'와 비교하면 완성도 차이가 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악당의 완성도는 명분과 카리스마가 중요한데, 드레이코프는 동기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관객에게 '악당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설득을 해야 하고, 영화의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주인공을 위협하고, 위기에 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캐릭터의 고유성도 중요합니다. 드레이코프는 이런 항목 모두에서 수준 미달입니다. 어벤저스가 무서워서 수십 년간 숨어 지냈다는 설정, 세뇌 개발자인 멜리나가 배신한 걸 알면서도 아무 대비 없이 나타샤와 단둘이 마주하는 장면 등은 서사적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서 몰입이 깨졌습니다. 영화 평론 분야의 분석에 따르면 관객이 빌런에게 일정 수준의 공감 혹은 경외감을 느낄 때 히어로의 승리가 더욱 감정적으로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출처: 로튼 토마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블랙 위도우의 빌런 구성은 영화 전체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대교체 영화로서의 블랙 위도우,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이 영화는 어벤저스 이후에 나왔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마블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가 나오지 않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봤기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블랙 위도우' 영화의 주인공은 '나타샤'인 줄 알았는데, 엘레나와 비중이 비슷했던 점도 아쉬웠습니다. 엘레나 벨로바는 분명히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나타샤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훨씬 솔직하고 유머 감각도 있으며,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플로렌스 퓨의 연기력은 그 자체로 독보적이었고, 많은 분들이 이 영화 이후 엘레나 단독 작품을 기다리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타샤 로마노프의 단독 영화를 기대했던 저는 이 영화가 세대교체를 위한 영화여서 슬펐습니다. 나타샤는 어벤저스 1편부터 함께한,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와 동등한 위치에 있던 창립 멤버입니다. 그런 인물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영화의 온전한 주인공이 나타샤가 아니었기 때문에 팬으로서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세대교체(generation transition)란 기존 인물의 서사를 충분히 마무리한 뒤, 새로운 인물에게 넘겨주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났습니다. 나타샤의 이야기가 먼저 완결되어야 엘레나의 등장이 의미 있고 감동적인데, 실제로는 엘레나를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서사가 할당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외적인 맥락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개봉이 연기되면서 디즈니 자체 OTT와 동시 공개되었는데, 스칼렛 요한슨은 이 결정이 원래 계약에 따른 극장 수익과 성과에 비례해 추가로 지급되는 보수를 침해했다며 디즈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소송은 이후 합의로 마무리되었지만, 여배우가 처우 문제로 제작사와 직접 법적 다툼을 벌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MCU 성별 임금 격차 및 계약 구조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출처: Variety). 저는 이 부분이 그저 업계 분쟁이 아니라, 어벤저스 시리즈를 통해 흥행을 함께 만들어온 배우에게 보인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벤저스 서울 장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가로지르던 나타샤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런 캐릭터와 배우에게 마지막까지 상처를 남긴 제작사에게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어벤저스에서 블랙 위도우의 퇴장이 너무 허무했고, 이 영화를 기대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비록 블랙 위도우의 개인 영화는 이 영화 한 편 밖에 없지만, 블랙 위도우는 저의 영원한 어벤저스이자 영웅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