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 '스파이더맨' 1편을 영화관에서 처음 봤을 때는 오락형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미줄을 타고 뉴욕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장면이 그냥 재미있고 신났는데, 나이 들고 다시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세 명의 배우가 같은 스파이더맨을 연기했고, 각 영화가 다른 감상을 안겨줬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건지, 이 시리즈가 왜 20년이 넘도록 사람들 마음에 남아있는 건지 한번 짚어보려 합니다. 이 글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공통 서사와 철학을 정리하고, 각 시리즈를 비교했습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 공통 서사: '책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1대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토비 맥과이어, 2대 앤드류 가필드, 3대 톰 홀랜드. 이 세 배우가 연기한 피터 파커는 성격도 다르고, 연애 상대도 다르고, 싸우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느 작품에서도 빠진 적 없는 서사가 있습니다. 바로 벤 삼촌의 죽음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메시지입니다. 스파이더맨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다 오히려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이걸 서사적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서사적 원형이란 특정 이야기가 문화와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근본적인 서사 방식입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정립한 영웅 서사의 틀과 맞닿아 있는데, 스파이더맨은 그 형식을 히어로 영화 중에서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박스오피스 흥행 데이터를 보면 이 공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드러납니다. 2002년 1편이 국내 서울 기준 112만 관객을 동원했고, 이후 시리즈는 전국 기준으로 200만~490만 명대까지 성장했습니다. 같은 구조를 반복하면서도 매번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은, 이 이야기 자체가 관객의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매 시리즈마다 스파이더맨은 선택의 기로에 서는데, 그 선택이 항상 정답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반드시 치릅니다. 스파이더맨의 '승리'는 완전하고 행복한 승리가 아닙니다. 스파이더맨은 이기고도 무언가를 상실합니다. 스파이더맨에는 그런 상실을 동력으로 바꾸는 서사가 존재합니다.
철학: '불완전한 영웅'이라는 개념의 무게
스파이더맨이 다른 히어로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가 '옳다는 확신 없이 행동하는 영웅'이라는 데 있습니다. 아이언맨은 자기 결정에 자신감이 넘치고, 캡틴 아메리카는 도덕적 기준이 확고합니다. 그런데 피터 파커는 자기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불완전한 영웅입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의무론(Deontology)이라는 두 윤리 철학의 충돌을 다룹니다. 공리주의란 '다수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는 선택이 옳다'는 관점이고, 의무론은 '결과와 관계없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스파이더맨은 다수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감정이 그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영웅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철학적으로 눈여겨볼 부분은 '익명성'의 문제입니다. 스파이더맨은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가리고 활약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릅니다. 페르소나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내는 자아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피터 파커는 학생 혹은 평범한 청년으로서의 페르소나와 스파이더맨으로서의 페르소나를 동시에 유지해야 합니다. 이 이중성의 피로가 그를 고뇌에 빠뜨립니다. 관객이 이 인물에게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영웅의 현실적인 고민이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모르는 채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현대인은,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를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시리즈 비교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은 제일 오락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키스하는 장면, 거미줄 타고 뉴욕 빌딩 사이를 이동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당시 CG 기술이 스파이더맨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시점에 이 영화가 만들어진 건 행운이었습니다. 나중에 뉴욕이라는 배경 덕분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이 활약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더 재미있었습니다. 들판이나 숲에서는 스파이더맨이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은 액션 연출에서 세 시리즈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스파이더맨이 이동하는 장면은 카메라 구도만 봐도 차이가 납니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자유롭게 전환되며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지금 봐도 이를 넘어서는 시리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각본의 개연성이 장면의 화려함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톰 홀랜드 버전은 아이언맨과의 사제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스파이더맨 단독 서사보다는 마블 스튜디오 유니버스라는 세계관 안에서의 역할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 점은 오래된 팬들에게 비판을 받는 이유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 웨이 홈'의 결말에서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로 한 주인공의 선택은, 세 시리즈 중 가장 고독한 결말이었습니다. 직접적인 죽음이나 상실이 아닌 '망각'으로 모든 걸 잃는 방식이 씁쓸하게 남았습니다. 제가 모든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스파이더맨 2에서 연인을 잃고 오열하는 주인공의 얼굴이었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무의식적인 기대가 있었는데, 그 기대를 정면으로 깨버리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제작된 '노 웨이 홈'에서 2대 스파이더맨 앤드류 가필드가 3대 스파이더맨의 연인을 받아낼 때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연인을 잃었던 기억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 다른 평행 세계의 '스파이더맨'이 겪을 뻔한 상실을 막아내고, 슬프고도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줬습니다. 그 표정을 보고 2편에 대한 슬픔이 조금 나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가장 오랫동안,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 온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가 20년 넘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가장 인간적인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