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은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처음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인간화가 된 여러 원소들이 등장하고, 물인 남자 주인공과 불인 여자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불은 뜨겁고 직설적인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도 화끈하게 표현할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자기 본성 때문에 주변을 상하게 할까 봐 조심하는 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엘리멘탈 영화 속 CG 기술, 감정구조, 재평가를 정리하겠습니다.
엘리멘탈 CG 기술과 원소 표현의 완성도
일반적으로 픽사 하면 3D 애니메이션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물과 불의 묘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먼저, 엠버가 모래를 녹여 거대한 유리벽을 만드는 줄거리가 예상외였습니다. 모래가 열을 받아 서서히 유리로 굳어지는 과정을 실제처럼 구현했는데, 불이 타오르는 장면으로만 불을 묘사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는 장면이었습니다. 물이 빛을 반사하여 산란하는 장면도 아름다웠습니다. 3D 장면이라기보다는 실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장면들로 3D 렌더링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실감했습니다. 3D 렌더링이란 컴퓨터가 3차원 데이터를 계산해 빛, 질감, 반사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픽사는 이번 작품에서 불꽃의 투명도, 열기에 의한 공기 굴절, 물방울의 표면장력까지 각 원소의 물리적 특성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효과는 픽사에서도 최초로 구현한 장면입니다. 특히 물과 불이 접촉할 때 발생하는 증기 효과는 실제 사진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각 원소의 이동 방식과 질감도 원소의 물리적 성질을 반영해서 픽사 특유의 상상력이 돋보였습니다. 픽사 공식 제작 발표 자료에 따르면, 엘리멘탈 개발팀은 불 표현을 위해 기존 시뮬레이션 파이프라인을 전면 재설계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감정구조
처음 영화를 볼 때는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성장기와 자기감정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까웠습니다. 엠버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역할 동일시(role identification) 성향이 강한 인물입니다. 역할 동일시란 자신의 내면 욕구보다 주어진 역할이나 타인의 기대를 자아의 중심으로 삼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압박이 엠버의 정체성 자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아버지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때마다 좌절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엠버가 작은 실수에도 과하게 반응하는 장면들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감정을 오래 누르다 터지는 장면도 공감이 됐습니다. 반면, 물로 이루어진 남자 주인공인 웨이드는 공감 능력이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여자 주인공이 그의 가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가족 일원 중 한 명이 이야기 서두를 꺼내는 한마디에, 다른 가족들이 바로 눈물을 훌쩍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웃으면서, 동시에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가정환경이 웨이드의 감정 개방성을 만들었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엠버를 설득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고 옆에서 버팀목이 됩니다. 누군가를 몰아붙이는 대신 포용하는 방식이 그의 가장 강한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 맥길 대학교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으로 안정된 관계는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보다 수용과 공감에서 형성된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출처: 맥길 대학교). 여기서 애착 이론이란 인간이 가까운 타인과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심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웨이드와 엠버의 관계도 이러한 애착 이론을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재평가
엘리멘탈은 개봉 초기에 로튼 토마토 평론가 점수 60% 미만을 기록했다가 이후 70%대로 회복했습니다. 자극적인 반전 없이 감정의 변화에 공을 들이는 방식은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두 번째 볼 때는 앞에서 흘려보낸 장면들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불이 자신의 성질 때문에 조심스러워한다는 설정 역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민 1.5세대가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것으로 읽힙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흙과 공기의 비중이 워낙 적어서, 그 풍부한 세계관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느낌은 남습니다. 갈등의 축이 되는 누수 문제도 후반부에 가서야 긴박하게 처리되는 방식이 다소 산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버가 모래를 녹여 유리를 만들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그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멘탈은 처음 봤을 때와 다시 봤을 때 느낌이 꽤 다른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CG 기술에 시선이 갔지만, 두 번째 관람에서는 주인공들의 행동과 태도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로맨스로 분류되지만 사실 가족 이야기이자 성장기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큰 여운이나 감동을 주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니지만, 한 번쯤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