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만, 때로는 서로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이 영화 속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사랑'의 다른 면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뮤지컬 '랭보'를 본 뒤 뒤늦게 이 영화를 찾아봤는데, 뮤지컬과는 다른 느낌으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1995년작 '토탈 이클립스'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과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실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전기 드라마입니다. 열여섯 살 소년이 내뱉은 말이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16살 소년, 랭보
영화 초반,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베를렌(데이비드 듈리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없어요. 이기심과 공포, 어리석음이 있을 뿐이죠.' 저는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무척 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살 소년이 떠올리기에 너무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발언은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과 닿아 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 존재의 본질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상입니다. 쉽게 말해,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결국은 '나'를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랭보는 실존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도 전에 이미 그 핵심을 직관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랭보를 천재로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시를 잘 써서가 아닙니다. 그는 16세에서 19세 사이에 쓴 작품들로 현대시의 문법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시인은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감각의 착란이란 익숙한 사고방식과 언어의 틀을 의도적으로 부수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랭보는 자신의 삶 전체를 그 실험의 장으로 삼았고, 영화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따라갑니다. 개인적으로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할을 맡은 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홀릴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에 반항적인 눈빛이 겹쳐지니, 베를렌이 모든 걸 내던지고 이 소년을 따라가는 심리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원래 이 역할은 리버 피닉스가 거의 낙점됐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디카프리오가 대신 맡게 됐습니다. 촬영 당시 그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 랭보는 16~19세 사이에 쓴 시로 현대시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 '사랑은 재창조돼야 한다'는 말은 실존주의 철학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 디카프리오의 기용은 그를 아역 이미지에서 성인 연기자로 탈바꿈시킨 분기점이었습니다
토털 이클립스라는 제목의 의미
이 영화의 제목인 '토털 이클립스(Total Eclipse)'는 개기일식을 뜻합니다. 개기일식이란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 지구에서 태양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 짧은 시간 동안만 일어났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 제목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동양의 '시절인연'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시절인연이란 인연이 무르익을 때 만나고 그 시절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뜻하는 불교적 개념입니다. 랭보와 베를렌은 서로에게 잠시 겹쳐졌다가 다시 각자의 궤도로 돌아간 셈입니다. 프랑스 영화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시절인연이랄까요. 제게 프랑스 영화들은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이어서 처음 보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두 시인의 실제 삶이라는 배경 덕분에 그 낭만주의가 오히려 설득력 있게 작동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의 감상은 '서로를 망가뜨리는 사랑도 있다'였습니다. 이런 사랑은 강렬하고 진지하지만, 불완전하고 늘 서로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두 사람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애착 불균형(Attachment Imbalance) 구조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애착 불균형이란 관계 안에서 한쪽은 과도하게 의존하려 하고 다른 쪽은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두려는 상반된 마음이 충돌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베를렌은 랭보를 잃는 것이 두려워 집착하고, 랭보는 속박당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도망칩니다. 이런 심리로 강한 끌림과 동시에 극단적인 갈등도 반복됩니다. 저는 랭보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감정이 더 극단으로 흘렀다고 봅니다. 자신의 모든 감수성을 시에 담아 온 사람이니, 베를렌을 향한 감정도 거를 것 없이 쏟아붓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혹자는 이걸 정열적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만, 저는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나누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감정은 상대에게 부담과 두려움을 줍니다. 반면 베를렌은 이기적이고 겁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랭보도, 사회적 지위도 전부 붙잡으려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습니다. 도망과 회피가 반복되는 모습은 어른답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그런 베를렌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찢기는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냅니다. 실제로 영화 심리 묘사는 각자의 입장과 혼란을 꽤 균형 있게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랭보는 태양을 사랑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집 제목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인데,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 갈리카(BnF Gallica)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곳의 삶이 지옥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뜨겁게 끓인 물도 식고, 아무리 깨끗이 치운 방도 다시 지저분해집니다. 이걸 열역학에서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엔트로피 증가란 닫힌 계 안에서 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간다는 원리입니다. 열정이 식고 그 찌꺼기가 쌓이면 어떤 관계도 엉망이 되어가는 것, 랭보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랭보는 자신의 시로 이렇게 말합니다. '찾았어. 영원을. 그건 태양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야.' 50억 년 동안 한결같이 타오른 태양, 그 태양이 수평선과 닿는 순간만큼은 유한한 인간도 영원에 닿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두 사람의 생애와 영화 제목이 완벽하게 맞물린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토탈 이클립스(개기일식): 두 사람이 잠시 완전히 겹쳤다가 다시 멀어지는 관계의 은유
-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모든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무질서해진다는 물리적 원리가 사랑에도 적용됨
- 랭보의 유일한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철': 영원한 것이 없는 세계를 지옥으로 바라봄
영화 평가
'토털 이클립스'를 두고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급격하게 오르내려 연결이 어색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창작자의 상상보다 두 사람이 남긴 편지와 시의 기록에 철저하게 의존했기 때문에, 극적 연결이 다소 불규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볼 때는 감정 전환이 갑작스럽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영화는 실제 두 사람의 관계가 그토록 예측 불가능했다는 것을 불규칙한 편집을 통해 사실적으로 전달합니다.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는 애초에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고, 영화도 그것을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1995년 국내 개봉 당시 두 사람의 키스 장면 일부가 검열 삭제됐을 만큼,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동성애를 법률적으로도 죄악으로 취급하던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살얼음판 위에 있었는지도 영화는 놓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베를렌이 동성애자 검증을 받고 수감되는 장면은 당시의 실제를 재현한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나이 차이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현대인인 저의 시점에서는 이 문제가 더 크게 보입니다. 이 영화가 랭보의 시와 삶을 예찬하는 영화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영화 속 랭보는 그만큼 치명적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랭보를 영웅으로만 그리지도 않습니다. 프랑스 시인 연구자들에 따르면 실제 랭보는 스무 살 이후 문학을 완전히 접고 아프리카에서 무역상으로 살다 37세에 사망했습니다(출처: Poetry Foundation — Arthur Rimbaud). 세상을 바꾸겠다던 천재가 조용히 사라진 삶을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자리에 남는 건 무엇인가. 베를렌은 말년에 '나의 가장 크고 찬란한 죄악. 우린 행복했다. 항상.'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불안하고 불균형했던 관계를 그는 끝내 행복으로 기억했습니다. 랭보의 말대로 사랑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남은 것은 이기심도 공포도 아닌 무언가였던 것 같습니다. 뮤지컬 '랭보'를 본 뒤 뒤늦게 찾아본 영화였지만, 저는 이 영화도 재미있게 봤습니다.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를 어떻게 읽느냐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저처럼 베를렌을 겁쟁이로 볼 수도 있고, 그를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판단은 직접 보고 내려보시길 권합니다.
- 감정 전환이 급격한 것은 기록에 충실한 연출 방식의 결과이며, 오히려 사실성을 높입니다
- 1995년 국내 개봉 당시 키스 장면 일부가 검열됐을 만큼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 랭보는 스무 살 이후 문학을 완전히 떠났고, 영화는 그 결말을 미화하지 않습니다